기억과 망각, 그 사이의 나

얼마 전 전공 수업 과제를 하기 위해서 과제 창을 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장 하나를 마주쳤다.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이라는 문장이었는데 너무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모순된 두 단어가 한 문장에 있는 것 같아 계속해서 뇌리에 맴돌았다. 왜 곱씹게 되고 계속 생각이 나지 싶었는데, 우리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막연히 생각해 보면 삶은 기억과 망각의 미묘한 조화가 발생하며 흘러간다. 이는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성장과 발전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이를 인지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은 과거 우리의 모든 순간을 간직하게 만들고 이것이 축적되어 현재의 나를 만들어 낸다. 또한 망각은 의도치 않게 불필요한 기억을 걸러 내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경험을 채워 넣음으로써 우리를 새로운 일상으로 이끈다. 피상적으로 봤을 땐 기억과 망각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개념으로 보일 수 있다. 나 또한 그랬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상반되는 개념임과 동시에 상호 보완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삶이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린 남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기억이란 무엇인가. 기억은 과거의 순간들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우리가 과거에 잠시나마 머물 수 있게 해주는 연결고리가 되는 듯하다. 아무것도 몰랐을 그 시절 지었던 미소, 잊지 못할 정도로 특별했던 순간의 분위기, 좌절과 실패의 감정 모두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이는 후의 인간관계에도 어떠한 형태로든 깊은 흔적을 남겨 놓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따뜻한 햇살과 그 속에서 느껴진 온기, 풋풋했던 사랑의 설렘, 성취의 순간들은 우리가 현재에 서 있을 수 있게 돕는다. 이는 우리가 지속해서 과거와 현재의 나 사이 유대감의 정서를 느끼게 하고 때론 과거의 나를 되새김하면서 현재를 살아가게 한다. (나 또한 지금의 삶이 고되고 지칠 때 가끔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에 기대어 지친 현재의 나를 달래곤 한다.) 이렇듯 기억은 우리의 존재에 뿌리를 내리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기억과 동시에 공존하는 망각은 뭐길래,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일까. 어떠한 사실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아픈 일이다. 친구들과 시시콜콜하게 떠들던 기억, 누군가를 좋아해서 나의 모든 시간을 그 사람에게 바쳤던 기억 등 나름 행복했던 순간을 모조리 앗아가 버리는 건 그 무엇보다 나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이지만 망각은 이와 동시에 새로운 경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과거의 상처와 실패, 좌절과 아픔을 딛고 우리를 일어나게 하는 것도 망각 덕분인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아픈 기억들을 딛게 해주진 않는다. 누군가와 헤어져서 힘들었던 기억, 소중했던 누군가를 잃는 기억과 같은 감당해낼 수 없을 정도의 아픈 경험들은 기억의 공간에서 상처의 흔적으로 남아 나의 인간관계와 미래의 결정들에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에게 배신당해 미칠 정도로 힘들었던 기억은 후에 내가 사람들을 사귀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소중했던 그 사람과 이별하는 기억은 누군가와 새로운 인연을 맺는 과정에 여러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인연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을 망설이게 만든다. 이렇게 아픈 경험들이 현재의 우리를 옥죄일 때 때론 망각보단 기억의 힘에 기대어 과거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즉 기억은 우리를 과거의 순간으로 안내해 현재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망각은 현재의 연약한 나를 도약하게 하며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열어 준다. 이를 조화롭게 형성해 나갈 때 이것은 우리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이처럼 기억과 망각은 상충하는 것으로 여길 순 있으나, 서로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공존한다. 결국 우리의 삶은 기억과 망각의 조화 속에서 깊은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름답다면 아름다울 풍경을 형성하는 것 그 자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