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은 언제나 즐겁다. 나는 새롭게 생겨난 것들을 알아냈을 때보다 원래 있었던 것들을 알아챘을 때 더 기뻐한다. 가을에 서촌을 걷다가 나는 이 미술관을 발견했다.
박노수 미술관은 생전 화가가 살던 주택을 개조한 미술관이다. 가옥은 1937년경 서구와 일본의 절충식 기법으로 지어졌고 다다미방과 온돌방에서 양풍의 개폐창을 이용해 서양풍의 외관을 하고 있다. 본래는 한 건축가가 딸을 위해 만든 저택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박노수 화백이 소유하게 되었다. 정원이 달린 집에 살고 싶어서 이 저택을 선택했다는 화백의 말처럼 저택의 정원은 볕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신발을 벗으라는 안내를 받았다. 미술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바닥은 마루로 되어 광택이 돌았고 발을 디딜 때마다 작게 끼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실로 들어가자 전시의 대표작 <류하>가 보였다. 선명한 푸른색이 압도적이었다.
류하(柳下). ‘하’는 ‘여름 하’ 자가 아닐까 했는데 ‘아래 하’였다. 버드나무 아래서.
박노수는 주로 산수와 문인화와 산수풍경화를 그렸고 재료는 한지에 수묵담채, 수직 수평 구도가 많았다. 그리고 그림 속 인물들이 대부분 왼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왼쪽 너머에 무언가 있는지 궁금했다.
맑은 바람이 불어와도 물결은 일지 않는다 <강>
1984년 봄에 남정 그리다.
항상 조용한 곳을 관찰하니 세월이 좋고 언제나 한가할 때 사려가 많도다 <상관정>
1983년 봄 남정
남정은 그의 호(號)이다. 나는 그림 하단에 적힌 짧은 코멘트들이 좋았다. 간결하고 산뜻한 회화에 어울리는 선명한 단어들.
나는 대표작 <류하>보다 <수하>와 <강가>가 더 기억에 남았다.
박노수는 1970년부터 먹이 섞인 짙은 남색을 자주 사용하다가 점차 먹색을 덜어내었고, 1972년 여름부터 독특한 군청을 고안했다(프러시안블루에 가깝다)고 한다. 이후 점차 박노수의 군청은 명도와 차도가 높아져 코발트블루로 변화했고 이는 80년대까지 지속되어 상징색인 쪽빛 색을 발현하게 되었다.
작품 설명에는 쪽빛이 선명해졌다고 했는데 내 눈에는 조금 많이 어두워진 것 같았다(1970년대 작 <류하>보다 1990년대 작 <수하>가). 다시 본래의 군청으로 돌아간 것처럼. 쪽빛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미술관을 나오면서 이곳을 여름에 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택에 흐드러진 낙엽은 운치 있었지만 아무래도 푸르지 않았다. 이곳에서 1972년 박노수가 보낸 여름에 나무들은 어땠을까.
내게 그림은 쓸모없었지만 언제나 좋아하던 대상이었다. 전시를 보면서 그림이 다시 그리고 싶어졌다. 내년 여름은 쓸모없이 좋은 것들로 가득 둘러싸여 보내야겠다.
출처: 종로문화재단, 박노수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