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사진으로 따라간 <헤어질 결심>(2022)
태생부터 한량 나쁘게 말하면 날라리였다. 놀고 싶으면 놀았고, 공부하기 싫을 때면 하지 않았다. 대학에 와서도 바뀌는 건 딱히 없었다. 숫제 수업은 빠지기 일쑤였고, 평소엔 뒤에 앉아 엎드려 잤다. 사람의 기질은 바뀌지 않는다더니 정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열정이 있었다. 나의 동인(動因), 나의 애증, 신문사. 수업이 끝나면 항상 기자실에서 카메라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본 글은 기자 활동 당시, 영화 <헤어질 결심>을 관람하고 영감을 받아 작성하게 된 기사를 토대로 작성됐다. 영화에 등장하는 촬영지를 좇아보는 기행문의 형식을 띤다. 즐겁게 읽어주기를 바란다.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글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앙드레 지드(Andre Gide), 『지상의 양식』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다.”
정서와 묘사의 온전한 전달은 체험으로 완성된다. 이 글 또한 나의 체험을 글로 옮긴 것이나 최대한 온전한 전달을 위해 노력하겠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촬영지들을 맨발로 느끼기 위해 대부분의 배경이 그려지는 부산행 기차에 올라탔다. 부산까지 이동시간은 2시간 반 정도였다. 마음 놓고 기찻길 위에서 영화를 재생했다.
영화는 늙은 남성이 산에서 추락사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자살일까? 타살일까? ‘서래’는 죽은 남성의 아내로 경찰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에 호출됐다. 그녀는 유력한 사건 용의자이면서 젊고 예쁜 외국인이다. 유능한 형사이고 수시로 인공눈물을 넣으며 뭐든지 똑바로 보려고 하는 ‘해준’은 그런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집요함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심문을 할수록 그녀를 향한 해준의 관심은 깊어지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서래: 기도수 씨 아내. 송서래입니다.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부족합니다.
해준: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서래: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봐.
해준: 마침내…… 저보다 한국말 잘하시네요. ……패턴을 좀 알고 싶은데요?
부산엔 2박 3일간 있을 예정이었다. 계획한 촬영지들에 다녀오기 충분했다. 조금은 여유를 부려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촬영지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부산역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곧바로 초량동의 초원아파트 부근으로 향했다. 초량동은 영화 초반, 해준과 그의 동료 ‘수완’이 영화의 보조 사건인 ‘질곡동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 추격전을 벌이는 곳이다. 해준과 용의자가 싸움을 벌이는 옥상까지 가려면 길고 긴 계단을 올라야 했다. ‘해준은 체력도 좋지. 이 계단을 잘도 뛰어 올라갔구나.’ 마지막 계단을 힘겹게 딛고 오르면 바로 오른편에 촬영장소가 보인다. 사진 한 장만 찍으면 되는데 민소매를 입은 집주인이 촬영장소 앞에 서서 찍지 말라는 눈으로 째려봤다. 멀뚱멀뚱 집주인이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괜히 하늘도 한 장 찍었다. 집주인이 담배를 피러 잠시 비킨 사이 잽싸게 셔터를 눌렀다. 사나이간의 기싸움에서 승리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해준은 이 옥상에서 용의자를 포위한다. 용의자를 때려눕히고 수갑을 채우고 나니 온 몸의 힘이 빠진다. 경찰 조사를 마치고 해준을 몰래 뒤따라간 서래는 그와 눈이 마주친다. ‘이 강인한 형사를 어떻게 이용해야 내 혐의를 벗을 수 있을까?’ 해준은 손가락 관절 사이를 타고 흐르는 피를 서래에게 보이지 않게 숨긴다.
해준: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지도 않고 옷도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놓고 티브이 켜 놓은 채 불편하게 잠…. (중략) 저녁은 또 아이스크림. 식후 흡연은 안 됩니다…. 우는구나……. 마침내
해준은 오늘도 잠복근무다. 서래가 무혐의라는 것을, 늙은 남편은 자살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열심이다. 용의자가 관심의 대상이 된 해준에게 잠복근무는 의심 행동을 포착하여 증거를 확보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서래를 관찰하려는 공적 알리바이에 가깝다. 서래가 집에서 먹던 아이스크림과 같은 맛이길 바라며 우유 맛 아이스크림을 사서 촬영지로 향했다. 해준이 잠복하던 건물을 찾기 위해 영화를 여러 번 재생했다. 서래의 집 오른편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면 됐다. 해준이 앉아있던 정확한 위치에서 서래의 집을 겨냥해 최대한 줌인(Zoom in)했다. 도촬 신고가 들어올까 얼른 카메라를 목에 걸었다. 그러던 내 뒤엔 평상 위에 앉아 과일을 드시고 계신 할머니 두 분이 계셨다.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보며 과일을 깎아 건네주셨다. 방금까지 먹던 아이스크림보다 달지는 않았지만 촬영지에 갈 때마다 사진에 의미가 더해지는 것 같아 즐거웠다. 필요한 사진을 다 찍고는 염치없이 평상에 앉아 과일을 입에 넣었다. 할머니들께 이 장소가 영화 촬영지라는 사실을 알려줬는데 모르는 눈치였다. 기이했다. ‘혹시 최근에 이사 오셨나?’ 괜히 더 섬뜩해질까봐 끝까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해준 : 사진 태우고, 내가 녹음한 파일들 다 지우고…… 그것도 참 쉬웠겠네요? 좋아하는 느낌만 좀 내면 내가 알아서 다 도와주니까?
서래 :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해준 : 우리 일, 우리 일 무슨 일?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중략)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사건은 자살로 종결됐다. 하지만 자살이 아니었다. 서래가 남편을 죽였다. 해준은 사랑에 눈이 멀어 완전히 속았고 남아있는 유일한 증거인 핸드폰마저 서래에게 쥐어준다. 이후 관계를 끊고 근무지를 옮긴다. 한국어가 서툰 서래는 해준이 떠나자 사전에 단어 ‘붕괴’를 검색한다. ‘붕괴: 무너지고 깨어짐.’
부산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강원도 삼척시에 갈 계획을 짰다. 하지만 촬영지까지 편도로만 6시간이 걸릴 만큼 교통편이 열악했고 결국 같은 장면의 다른 촬영지인 충청남도 태안군의 마검포해수욕장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물론 이곳도 여정이 만만치 않았다. 고속버스를 타고 촬영지 근처인 안면도에 도착했다. 바닷가 근처라 그런지 안개가 껴있었다. 정류소에서 하루에 세 번 운행하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곧 비가 내리니 실내에 들어가라는 공공안내방송이 들렸다. 운전면허를 미리 따지 않았음에 탄식했다. 날씨는 점차 흐려졌고 버스에 탔다. 기사는 유일한 승객인 나에게 사진작가냐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했다. 말문이 트인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계속했다. 태안 토박이인 버스 기사는 아예 중간에 버스를 세우더니 담배와 함께 재담을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왜 승객이 나뿐이냐고 물었다. 그는 요즘 외지인은 고사하고 주민들도 잘 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태안에만 수십 개의 해수욕장이 있는데 왜 외부인들이 아무도 버스를 이용하지 않을까? 사실 당연했다. 버스에서 내리고도 40분을 더 걸어야하기 때문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에게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출발해달라고 요청했다. 목적지에 내리고 터벅터벅 걸어 바다에 도착했을 때는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울할 뻔 했지만 그래도 괜히 낭만 있었다.
서래 :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붕괴 후 해준은 우연히 또 다른 살인사건으로 서래와 재회한다. 또다시 형사와 용의자의 관계였다. 피살된 인물은 서래와 재혼한 남편이었고 해준은 과거엔 철석같이 믿었던 서래를 집요하게 의심한다. 사건의 범인은 서래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음에도 눈앞의 짙은 안개에 앞을 보지 못한다. 해준이 수시로 넣는 인공눈물은 제 목적을 잃는다.
앞이 안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엷은 안개가 깔린 바다는 마지막으로 방문한 촬영지이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모래는 소나기 때문인지 어딘가 묵직했다. 파도의 자국이 남아 진해진 고동색 모래띠를 따라 걸으니 작은 모래톱을 볼 수 있었다. 모래가 댐처럼 쌓여 파도가 넘어가는 것을 잠시 막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만조가 오고, 모래톱은 파도에 덮쳐지면서도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퍼졌다. 잠겨가는 모래톱에 바다 안개가 겹쳤고, 마침내 영화 속 모든 장면이 합쳐진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고속버스 안, 그 장면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됐다.
* 대사는 영화를 바탕으로 하되, 표기 방법은 『헤어질 결심 각본』을 참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