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딴: 어떤 일이나 물건 따위가 아주 망가져서 도무지 손을 쓸 수 없게 된 상태.
소리에는 구역이 있다. 소리가 발현되는 시작점에서부터 소리의 크기에 따라 구역의 부피가 정해진다. 지하철을 기다릴 때 들리는 구두 소리는 복도 전체로 퍼진다. 하지만 지하철이 온다면, 구두 소리를 지하철의 기계음이 덮을 것이다. 물론 그 소리에도 끝이 있기 마련이지만 범위의 끄트머리까지 최대한 뻗어나간다. 소리는 파동의 일종이다. 우리들은 소리 파동, 즉 음파를 귀로 느낄 수 있다. 지구의 대기가 파동이 전달될 수 있게 하는 매질이 돼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공 상태에서는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 소리 전달에 필요한 매개체가 없어서다.
일본 사회비판 작품의 표상
최근 <소년심판>(2022), <더 글로리>(2022~2023) 같이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많은 연예인들이 잇따른 학교폭력 논란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는 현재 국민들이 학교폭력을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교 폭력이 우리나라보다 먼저 사회문제로 대두된 국가가 있다. 바로 이웃 나라 일본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약 30년 빠른 1983년부터 학교폭력 실태 전수조사를 실시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형사정책 체계 개혁을 시작하는 등 일찍부터 대책이 논의돼왔다. 이후 잇따른 정책 변경을 단행했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2001년 6월 형사정책회의에서 발의된 「21세기 일본을 위한 형사정책」으로 개혁을 시도한다. 더 엄격한 법·형벌 집행이 주요 내용이었다. 또한 그 연장선상으로 2001년 「소년법(少年法)」을 통해 형사법원으로의 역송1 가능연령을 만 16세에서 만14세로 내리며 처분을 강화했다.
이렇듯 일본에서 처벌이 강해질 시기, 이와이 슌지(いわい しゅんじ, 1963~) 감독이 집필하고 감독한 <릴리 슈슈의 모든 것(リリイ・シュシュのすべて)>(2001)은 집단 괴롭힘을 뜻하는 일본어인 이지메(いじめ)의 지독함을 잘 담은 영화다. 작품 배경은 2000년 여름, 일본의 한 시골 마을이다. ‘유이치’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릴리 슈슈’라는 가수를 좋아하는 평범한 중학교 2학년이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친했던 친구들에게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중학교 입학식 때로 거슬러 올라가, 유이치의 과거를 파헤친다. 유이치는 부활동에서 만난 모범생 ‘호시노’를 비롯해 여러 친구를 사귀었고 함께 무지갯빛 학교생활을 즐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그 해의 2학기 첫날, 유이치의 학교생활은 잿빛으로 변한다. 호시노가 반의 불량 청소년을 폭행하고 방과 후에 그를 전라로 만든 후 논두렁에서 헤엄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호시노는 자신을 중심으로 패거리를 만들고, 소심하고 내성적인 유이치를 은근히 괴롭히기 시작한다. 처음엔 돈을 뜯는 정도였으나, 나중에 이르러서는 신체적·성적 폭력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폭력의 와중 가방 속에 있던 릴리 슈슈의 CD. 호시노는 유이치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안식처인 그 CD를 두 동강 낸다.
작품 속 세계관에서 릴리 슈슈는 ‘에테르2‘의 본질을 노래한다는 콘셉트를 가졌다. 그녀가 부르는 에테르에 감화된 마니아층은 그녀에게 컬트적인 사랑을 보낸다. 유이치는 릴리 슈슈 팬 카페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지메 당하는 아픔을 릴리 슈슈의 노래를 통해 치유하고 있던 것이다. 팬 카페에는 어딘가 상처입고 기댈 곳 없는 이들이 모여 있다. 공감 섞인 대화는 더없이 즐겁지만 결국 잠시일 뿐, 유이치는 오늘도 밖으로 나가 괴로움과 외로움에 맞서 싸워야 한다. 오늘도 릴리 슈슈의 노래를 들을 뿐이다.
이처럼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일본 내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이지메를 숨김없이 묘사한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권력과 계급의 형성, 피해자의 고통을 말이다. 2021년 일본 교육부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 초·중·고등학교의 21.4%가 넘는 학생이 학교에서 이지메를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이는 영화가 개봉한 2001년의 18.6%보다 증가한 수치다. 이 수치는 앞서 언급한 「21세기 일본을 위한 형사정책」 시행과 「소년법(少年法)」 강화의 효력이 크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강인함과 나약함
영화는 유이치 외에도 괴롭힘을 당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등장시킨다. 호시노 일당은 두 여성을 괴롭히는데, 한 명은 ‘츠다’다. 호시노는 츠다에게 원조 교제를 강요하고 돈을 챙긴다. 다른 여성인 ‘쿠노’는 반에서 따돌림당하며, 호시노 일당에게 겁탈당하기까지 한다. 둘은 같은 피해자였지만 결말은 상이했다. 츠다는 유이치와 친해지며 밝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직면해있는 잔혹한 현실에 결국 자살한다. 반면 쿠노는 강간당하고도 스스로 삭발을 한 채로 학교에 나타나는 등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가해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자신의 강인함을 주지시키는 행동이었다. 츠다가 나약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유 없는 결딴은 없는 법이다.
츠다와 쿠노는 극심한 괴롭힘의 피해자면서 이를 버텨내는 과정과 결과가 명확히 대비되는 캐릭터다. 이들을 괴롭히는 호시노는 두 인물 중 쿠노와 대척점에 선 흥미로운 캐릭터다.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대립이 아니다. 늘 괴롭힘을 당하는 쿠노는 나약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그 속에서 강인함을 보인다. 호시노는 반대다. 호시노의 강인함 이면에서 나약함을 찾을 수 있다. 첫 등장부터 자신감 넘치고 마초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사실 불우한 가정 환경, 우연히 목도한 죽음에서의 충격 등 복합적인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 호시노의 집엔 릴리 슈슈의 포스터가 붙여져 있다. 유이치가 운영하는 릴리 슈슈 팬카페 회원이기도 하다. 호시노도 유이치와 다르지 않게, 그녀의 음악을 들으며 스스로를 치유하던 것이다.
모든 가해자는 각자만의 이유를 대며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가 친구들을 괴롭히는 행동이 내면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가면으로 기능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처럼 영화는 모든 인물에게 시련과 결핍을 부여해 ‘누가 진정으로 강인한 인물이고, 누가 나약한 인물인가?’라는 질문을 얽어 던진다. 강인함 속 나약함, 나약함 속 강인함을 지닌 인물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이 질문을 깊숙이 파고들면, 가장 불편하고 아픈 질문에 도달한다. ‘무엇이 이 아이들을 이토록 불행하게 만들었는가?’
침묵에는 힘이 없다. 피해자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선 안 된다. 영화 속 아픔을 가진 자들은 단 한 번도 상담을 요청하거나, 신고를 시도하지 않는다. 오직 릴리 슈슈의 음악만 울릴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들의 세상을 진공 상태로 만든 게 아닐까. 자신은 있는 힘껏 고함을 내지르고 있지만, 주변이 그 소리를 전달할 매개가 없는 상태인 건 아닐까. 가해자의 형벌을 높이는 것과는 별개로, 피해자의 상황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서 공기를 주입하고 호흡하라!